흙수저 집안, 중위권 성적으로 변호사되기
먼저 제가 흙수저인 걸 이야기 해 볼까요?
저는 어려서부터 흙수저인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돈이 없어 사법시험준비를 포기할 때까지는 그랬습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섬마을이었습니다.
전남 여천군 돌산읍 금성리.
태어나보니 내 아버지는 농부, 내친구의 아버지는 농부나 어부였습니다.
다들 농부나 어부이니 내가 흙수저인지도 몰랐습니다.
열세살 때 경기도 수원시로 이사를 왔을 때 알게 되었습니다.
일년에 짜장면 몇번 못 먹는 내가 가난한 집 아들이구나.
초등학생이라고 같은 가격인데 면발을 조금 담아준 중국집 아저씨가 너무 미웠습니다.
아버지 직업이 농부라는 말에 친구들이 놀려댔습니다.
보증금 2천만원 방 두칸 전세집에서 내방이 없이 엄마랑 누나랑 같이 잠을 자는 나는 가난한 거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롯데리아에 들어가서 뭘 시켜야 하는지 몰라서 부끄러워서 들어가지도 못하는 내가 촌놈이구나 하는 걸 말입니다.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에도 내 주변에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 과외를 하는 아이들이 제법 있었지만, 나처럼 사교육을 받지 못하고 학교운동장에서 남은 하루를 보내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교복을 작은형에게 물려받았습니다. 너덜너덜한 교복, 끈이 다 떨어져가는 교복단추 새교복을 입은 친구들 사이에서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걸 또 놀리는 친구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저축을 못하고 한달 벌어 한달 사는 가정에서 자랐으니 흙수저가 맞습니다.
성적은 중위권이었습니다. 내신은 중상위권, 모의고사는 중위권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반에서 50명중 10등 정도이니 상위 20%정도였습니다.
고등학교 입학 때 전교생 700명중에 반배치고사에서 500등정도를 한 성적표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게 기억나네요.
고1 가을때부터 열심히 공부하면서 고2때부터는 반에서 1등이나 2등 정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이후 산수에 손을 놓고, 중학교 내내 100점 만점에 50점도 못 받은 수학성적이 고등학교때도 여전했습니다. 전교 1등과 나 사이에 유일한 차이는 수학점수였습니다. 수학은 기초가 없어서 도저히 공부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수능결과도 이변은 없었습니다. 수학을 제외한 대부분 과목이 최상위 점수였지만, 수학은 100점 만점이라면 60점을 조금 넘었나 해서 겨우 서울소재 중위권, 중하위권 대학교에 입학할 점수가 나왔습니다.
입학정보를 알려주는 사람이 주변에 전혀 없었습니다. 수능을 보고 막무가내로 서점에 가서 내신반영이 많이 되는 특차전형을 찾아서 한양대 법대, 한국외대 법대 특차를 넣겠다고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특차 떨어지면 담임선생님이 추천하는 하향지원을 하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하여 겨우 한국외대 법대 특차에 지원했고, 내신이 좋아서 최초합격이 되었습니다.
참 운이 좋았습니다.
수능성적이 상위 5%정도 되는 성적이어야 한국외대 법학과에 들어갈 수 있는데 상위 8%성적으로 들어갔으니 말이죠.
모의고사 수능성적은 상위 10%~20%사이였으니 더 운이 좋은 것이죠.
이정도면 성적이 중위권이라고 해도 되겠죠?
한국외대에 입학해보니 선배들은 일부 사법시험 준비를 하고 다수는 대기업 등에 취업을 했습니다. 천명을 뽑는 사법시험에 외대출신은 10명~20명 정도였습니다. 법대 정원도 다른 대학에 비해 적고, 사법시험준비하는 인원도 적었고, 합격인원도 명문대에 비해 많이 적었습니다.
논술공부를 거의 안해본 나는 1학년 1학기 중간고사때부터 대학교 시험이 참 난감했습니다. 글짓기를 거의 안해본터라 논술로 시험을 보는 대학교 시험에 적응이 힘들었습니다. 외대생 상당수는 고등학교때 논술공부를 병행했겠지요.
대학성적도 중위권이었습니다. 게다가 사법시험에 합격하려면 신림동에서 공부하는 것이 필수코스였습니다. 학교에서는 사법시험을 준비할 정도로 법학을 교육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교과서 살 돈도 없어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공부를 했기 때문에 신림동 갈 생각을 못했습니다. 물론 법학 공부도 제대로 안했기 때문에 법학을 공부하는 것이 막연히 두렵기도 했습니다.
공군에 입대해서야 법학교과서를 10회 이상 읽어보고 약간의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제대 후 학교에서 학점이 최상위권으로 잘 나왔습니다. 지적능력이 엄청나게 향상된 것입니다.
농부인 아버지는 돈이 없다며 신림동에서 고시준비를 하지 말라고 극구 말리셨습니다. 빨리 회사에 들어가든지, 붙기 쉬운 시험을 보라고 했습다. 저는 꿈을 포기하라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도서관에서 3년이 지난 판례집과 객관식 문제집을 빌려서 공부하던 나는 사법시험에 무조건 불합격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급하게 취업원서를 남발하여 운이 좋게도 대형로펌 연구원, 금융협회 직원으로 취업에 성공했습니다.
마음 한켠에 둔 법조인이라는 꿈은 늘 아쉬웠습니다. 27살의 나이에 꿈을 너무 빨리 접어버린 것 같아서 씁쓸했습니다. 결국 몇달 다니지 않고 안정적인 직장인 금융협회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외숙모중 한분이 뜯어 말린다는 소식도 들리고 친형조차도 이런 말을 했다.
니가 변호사가 될 수 있을까?
앞으로는 변호사가 많아져서 변호사 되도 별볼일없다더라.
7급 공무원시험준비해서 안정적인 공무원 되는게 좋지 않겠어?
그럼에도 내 유전자에는 도전DNA가 있나봅니다.
흙수저로 살아가면서도 현실에 순응하기보다는 무대뽀정신을 어려서부터 키워왔나봅니다.
나는 통장 잔고에 100만원도 없이 막무가내로 무작정 로스쿨 입시에 도전했습니다.
당연히 법학적성시험을 준비하는 학원, 토익학원은 못다니고 독학으로 준비하는 것이 뻔했고 자연스러웠습니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출신들이 대부분 지원한다는데 내가 로스쿨에 들어갈 수 있을까?
나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우수한 학벌, 좋은 어학스펙을 가진 입시생과 비교해 볼 때 경쟁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서점에서 구입한 문제집을 풀면서도 내 실력이 의심스러웠습니다.
막연한 자신감은 무대뽀로 공부해서 고등학생때 성적이 일취월장했던 것,
대학교 때 무작정 10회이상의 교과서를 읽으며 성적장학금을 몇번이나 받았던 것,
이런 성공경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흙수저 가정에서, 한달 벌어 한달 생활하는 집에서 당연히 로스쿨입시학원에 가는 것은 꿈도 못꾸었습니다.
온라인강의를 살돈이 없어 무작정 집근처 도서관에서 법학적성시험 문제집을 풀었습니다.
토익도 시험 준비를 한적이 거의 없어, 700점대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매번 시간이 모자라 독해부분을 거의 못풀었다고 지인에게 하소연을 했더니 영어과 출신인 지인은 그럼 독해부분부터 먼저 풀어보라고 조언을 했다. 그랬더니 시간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나. 910점이 나왔습니다. 독학으로 단기간에 150점 넘게 올리다니. 하늘이 돕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법학적성시험을 보았는데...점수가 2000명 안쪽으로 나왔다. 2천명이 로스쿨 입학정원인데 좋은 성적을 받으니 이제야 가능성이 보였습니다.
자신감이 더 생겼습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출신이 법학적성시험 응시자의 절반정도인데 상당수의 명문대생을 넘어섰다니 정말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꼭 합격하고 싶었던 나는 그리고 돈이 정말 100만원도 없었던 나는 등록금이 싼 국립대, 그리고 그나마 합격가능성이 높은 지방대를 썼습니다.
1차 서류전형에 합격하고, 집단면접, 개별면접을 다 치른 후 12월 어느날 합격을 인터넷사이트에서 확인했을 때 정말 감격스러웠습니다.
충북대로스쿨, 경북대 로스쿨 모두 저에게 최초합격통지를 보냈습니다. 스카이(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출신도 아니고, 리트점수도 최상위권이 아닌데 이렇게 바로 최초합격을 할 수 있었다니.
내가 너무 하향지원을 했나? 내 잠재력을 너무 저평가했나 하는 생각이 합격하고 나서야 들었습니다.
결국 경북대로스쿨을 선택했는데, 입학하고 보니 내가 130명중 상위 20%이내의 입학성적이라는 걸 장학금 신청을 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130명중 26명 안에 들 정도로 입학성적이 좋았음에도 불합격할 것을 두려워하며 덜덜덜 떨고 있었다니.
학벌이 전부가 아니고, 내 잠재력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도 모른 채 얼떨떨해 하기만 했습니다.
흙수저로 독학을 해야 했던, 성적이 중위권에 불과했던, 명문대 출신이 아닌 나는 어떻게 로스쿨에 한번에 입학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로스쿨 입시학원을 다니지 않고, 입시정보를 얻지도 못하고, 온라인 강의를 보지도 못하고
토익학원도 안다니고, 혼자서 영어를 독학하면서도 상위 20%이내의 성적으로 로스쿨에 입학했을까요?
아마 마음 속 깊은 곳에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영어 모의고사시험에서 절반도 못맞춘 후 독학으로 쉬운 문제집을 풀어가면서 결국 최상위권 점수로 끌어올렸던 작은 성취가,
대학교를 다니면서 법학교과서가 너무 어려웠지만, 군대에서 마음을 다지며 열번이상 이해를 못하면서도 꾸역꾸역 읽어가다가 점점 더 이해력이 생기면서 결국 4.33/4.5의 성적표를 받았던 성취감이,
무조건 도전하다보면 결국은 성공으로 다가온다는 자신감으로 마음 속에 각인되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