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김재호작가 2025. 5. 30.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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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시간 안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아들만을 시인했다.

이것은 사도신경에 의해서 명확하니 일렀으되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 성령을 믿사오며 ···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 거룩한 가톨릭 교회, 성도들의 공동체)을 믿사옵나이다.”

그런즉 그들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되었고, 영원부터 탄생된 이가 아니신 하나님의 아들만을 시인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시인했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주님에게 하늘과 땅, 그리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졌다”고 시인했다.

 

구약성경의 말씀에 분명히 선포하신대로,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스스로가, 질서에 따라 구속자가 되시기 위하여 강림하셨다가, 다시 새롭게 창조자가 되셨다.

 

바울은 ― .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함이 육체로 거하신다(골로새 2:9).

“세상에 보내진 하나님의 아들이 참 하나님이요 영원한 생명이다(요한1서 5:20, 21).” 고 했다.

 

인애는 믿음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죄를 용서받는 것과 회개하여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분리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 

예수가 따로 있고, 하나님이 따로 있고, 성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구원자이신 주님의 공로는 구속이다.

그 구속은 지옥들을 정복하시고 천국들을 질서 있게 배치하신 후에, 교회를 설립하시는 것에 있다.

이같이 구속은 순전히 신성한분의 일이었다.

구속에 의해서 주님은 주를 믿고 말씀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구원하신다.

이러한 구속이 없이는 아무도 구원될 수 없다.

구속은 순전히 주님 혼자만의 신성한 역사(役事)이셨다.

실로, 구속은 어떤 의미로는 천사의 천국과 교회의 새 창조였다.

 

주님의 공로와 의는 순수한 신성이시다. 만일 그 순수한 신성이 사람에게 직접 적용되고, 주입된다면, 그는 즉시 죽을 것이다. 즉 태양 속으로 던져진 통나무가 타서 재도 남기지 않게 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로써 주님의 공로와 의는 순전히 신성하기 때문에, 어떤 천사나 사람에게 전가에 의해서 직접 이전될 수 없음이 분명해질 것이다.

 

주님 스스로가 그 분의 신성한 공로와 그 분의 신성한 의를 가지고 사람 속으로 들어오신다면, 어떤 일이 생기겠는가? 사도 요한도 주님의 임재를 보았을 때 견딜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가 인자를 일곱 촛대사이에서 보았을 때, 주님 발 앞에 엎드려서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계시록 1:17)고 했기 때문이다.

 

신성한 의를 전가하고, 이양(移讓)하고, 적용함으로, 어떻게 곰 같은 사람이 양으로, 부엉이가 비둘기로 또는 가시나무가 감람나무로, 쐐기풀이 포도나무로, 변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의로워 진다기 보다는 오히려 정죄함이 될 것이다. 만일 표범과 부엉이, 가시나무나 쇄기 풀의 악한 성질(야성)이 먼저 제거되지 않고, 그러한 변화가 생길 수 있다면, 어떻게 참된 인성과 순진함이 대신 심겨지겠는가?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태 16:27).”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한 5:29).”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계시록 20:12, 13).”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시록 22:12).”

“내가 그 소행대로 벌하며 그 소위 대로 갚으리라(호세아 4:9; 스가랴 1:6; 예레미아 25:14; 32:19).”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리라(로마 2:5, 6).”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내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그에게 전가되었도다(사도행전2:21-23).”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 자신의 선 또는 악이 각자에게 전가된다는 증거와 증명들로 차 있다.

 

사람은 동물들이나 집들·소유물·밭·정원·숲·토지와 금속 그리고 돌들을 그 용도에 따라서 값을 친다.

선과 쓰임새는 하나이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 사람 안에 있는 선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지 않겠는가?

 

오직 하나의 인격(位·人格)만 있으며,

따라서 오직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주님이시고, 이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다

 

한 인격(人格) 안에 결합되어 있는 삼일성을 가르친다.

 

보이는 하나님과 접근할 수 있으며, 결합할 수 있는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 안에 보이지 않고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이, 마치 몸 안의 영혼처럼 계신다고 믿으며, 그분이 시간 안에서 사람이 되셨으므로 그분이 사람(Man`原人)이심을 믿는다.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요 또 구원주이신 한 분 하나님에게 두고 있다.

 

회개·개혁·거듭남·죄의 용서가 사람의 협동을 가지고 이룩된다고 가르친다.

 

선과 악의 전가를 가르치며, 동시에 믿음의 전가를 가르친다.

 

믿음을 그리스도 홀로에 두지 않고, 하나님이시며 구속주요 구원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 둔 믿음을 가르친다.

동시에 영접하고 협동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하는, 사람 측면의 자유의지에 믿음을 둔다.

 

주님에게 둔 믿음과 이웃을 향한 인애가 불가분리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종교를 만든다. 

 

주님의 공로는 구속이며, 그의 구속과 의는 어떤 사람과도 결합될 수 없는 신성한 일들이다. 

 

참된 진리들은 하나님은 결코 노하지 않으시며, 보복하거나 증오·정죄·처벌하지도, 지옥에 던지거나 시험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주님은 사랑 자체시고, 자비 자체요, 선 자체시며, 이들이 주님의 신적 본질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천사까지도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의 선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악을 행할 수 없다.

 

지옥의 영은, 그 안에 악마에게서 온 악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누구에게도 악 이외에 다른 것을 행할 수 없다.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산다면,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주님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는 영기가 실제로 있어, 온 자연계와 영계를 채우시고, 모든 사람들을 천국으로 이끄신다. 그것은 마치 대양의 세찬 물길과 같아서, 조용히 배를 옮겨간다. 주님을 믿고, 그의 계명을 따라서 사는 모든 사람들은, 그 영기 또는 물길에 따라서 천국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러나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돌아서서 지옥으로 인도하는 물길에 따라서 옮겨가는 것이다.

 

샘이 쓴 물을 내보낼 수 없고,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내지 못하며, 포도나무가 가시처럼 찌르거나, 백합꽃이 쐐기풀처럼 찌를 수 없으며, 또 히야신스 꽃이 찔레처럼 할퀴지 않을 것이다. 유해한 잡초들은 밭에서, 포도원에서, 그리고 동산에서 뿌리를 뽑아서 땅에 싸놓고 불살라야 한다. 바로 이것이 악한 자들이 영계에 들어 왔을 때, 생기는 일이다(마태 13:30; 요한 15:6).

 

믿음이 그 행위들에게 본질적인 성격을 준다.

 

믿음은 인애와 결합되기까지는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니다.

인애가 믿음과 결합 것만큼 인애가 영적인 인애가 된다.

인애 없는 믿음은 영적인 것이 아니므로 참된 믿음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에게 둔 믿음은,

내적인 형태 안에서 선이 참된 선이 되게 하지만,

 

참 믿음은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오고,

그 도우심이 우리들 자신의 선을 구원하는 선으로 만드신다는 믿음 아닌가?

그러니까 선과 결합된 믿음은 영생으로 인도한다. 

 

믿음은 선과 결합 하는가 또는 악과 결합하는 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1) 사랑과 그에 속한 것들은 의지 안에 있고, 지식과 총명 과 지혜에 속한 것들은 이해성 안에 있으며. 의지는 그의 사랑에 속한 것들에 영향을 주어 좋아하고 일치하는 일을 하게 하며, 그러므로 사람은 그의 사랑과 총명 여하에 따라서 그 사람 자신이 된다.

 

(2) 이로써 모든 선과 악은 의지에 속하며.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은 무엇이든지, 비록 그것이 악이라 할지라도, 선이라 하며, 사랑에 속한 생명이 되는 기쁨이 나오고, 이 기쁨에 의해 의지가 이해성 안으로 들어가 매력을 느끼게 한다.

 

(3) 그러므로 의지는 사람의 생명의 존재 또는 본질 그 자체이나, 이해성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타남과 실존이다. 본질이 그 형상 안에 있지 않고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의지 또한 이해성 안에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의지는 이해성 안에서 그 자체를 형성하며, 그래서 빛 안으로 나아가게 된다.

 

(4) 의지 안에서 사랑은 그 목적이고, 이해성 안에서 그 원인을 찾으며, 이들을 수단으로 결과를 얻게 한다. 또한 목적은 목표이고, 이것은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의도에 의해서 이해성 안으로 들어가고, 그 자체와 함께하기 위해 촉구하고, 결과에 달성하는 결론을 맺는다.

 

(5) 사람의 자아(selfhood)는 의지 안에 있고. 이 자아는 그 사람의 첫 출생 때는 악이나, 둘째 출생에 의하여 선이 된다. 첫 출생은 부모로부터 있으나, 둘째 출생(거듭남)은 주님으로부터 온다.

 

이들 몇 가지 상태로부터, 의지와 이해성의 속성이 같지 않으며, 창조 때부터 이들은 마치 있음(esse:존재)과 나타남(existere:실존)처럼 결합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은 일차적으로 의지로부터 사람이고, 이차적으로 이해성으로부터 사람이다. 그러므로 의지는 사람에게 전가되나 사상은 전가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악과 선은 모두 앞서 말한 대로 의지 안에 있고, 이해성은 사상 안에 있는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들과 함께 선을 받고자하는 만큼, 사고 속으로 흘러든다.

사람이 선과 진리를 선택한다면, 주님께서 그의 옛 의지 위에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성을 형성해주신다.

 

사람의 사상은 부모로부터 유전된 악들이 제거되고 정화 된다

 

선은 의지에 속하고

진리는 이해성에 속하며,

열매와 쓰임새로써 선에 상응한다.

 

교회는 인애와 믿음으로 그 가치가 주어지며,

그 의식적인 예배에 가치가 주어지지 않는다.

 

형식적인 것은 그 본질적인 것으로부터 가치가 있으며, 그 반대로는 아니라는 것이다.

 

의지는 본질적인 것이고, 생각은 그 형식적인 것이다.

 

 

 

지옥의 주된 세 원칙들은

1. 자아 사랑(love of self)으로부터 나온 지배욕(love of ruling)

2. 세상사랑(love of the world)으로부터 나온 소유욕(love of possessing)

3. 정욕(licentious love)들입니다.

 

천국의 주된 세 원리는

1. 선용의 사랑(love of use)으로부터 나온 주도 애(love of ruling),

2. 선용(씀씀이)을 실천하기 위한 소유 애(love of possessing)

3. 참된 결혼 애(true marriage love) 입니다.”

 

자아 애로부터 나온 지배욕이 그 가장 나쁜 의미에서 지옥이다.

선용(씀씀이)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나온 지배 애가 최고의 의미로 천국이다.

 

자기 자신에 의해서 행동하지 않고, 주님에 의해서만 행동한다.

씀씀이의 사랑은 주님으로부터 오고, 또 그것이 주님이다.

권위는 씀씀이를 완수하기 위한 방법으로만 가치를 둔다.

 

지옥 안에 있는 자마다 자기의 환상의 환희와 허영 안에 있게 되지만, 남들을 다치게 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람은 사후에는 한 영이고, 자기의 애정과 사상에 탐닉할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에게 부여된 권위를 우리들은 기꺼이 받습니다. 그러나 더 봉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우리는 명예를 가지며, 또 대우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어떤 것을 위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선용을 위해서 받습니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의 형제들은 명예가 우리들 자신 안에 내재하며, 우리가 수행하는 씀씀이들이 우리들 자신에게서 발한다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명예는 우리가 입는 옷들처럼, 우리에게는 외적인 것이고,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남들에게 쓸모가 있게 된다는 면에서 그 축복을 발견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경험에 의해서 아는 대로 사랑이 증가하며, 그와 함께 지혜도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씀씀이의 사랑이 남을 향한 봉사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모든 축복은 소멸됩니다.

 

천국은 씀씀이의 보편적 조직입니다.

씀씀이는 이웃 사랑의 나타남이며, 천국을 하나로 묶는 하나의 끈입니다.”

 

“마귀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평판을 위하고,

그들이 명예와 부를 획득할 수 있도록 씀씀이들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남을 섬기는 사랑에서 씀씀이들을 수행합니다.

사람들은 그 차이를 알 수 없으나 주님은 아실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악들을 죄로 여겨 피하는 자마다 주님에 의하여 씀씀이들을 수행하고,

그렇지 않는 자는 자신에 의해서 자신들을 위하여 씀씀이들을 수행합니다.

이것이 천사들에 의해서 수행되는 씀씀이와 마귀들에 의해서 수행되는 씀씀이들 사이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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