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우리는 권태가 필요하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 알베르 카뮈
그리스도교에서는 고통과 시련을 받는 이 세계의 삶은 단지 신의 시험이고, 그러한 모든 고난은 사후에 천국에서 보상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통과 모순으로 가득한 이 세계는 단지 저 세계인 천국을 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장재형
삶은 무의미하다는 허무주의를 니힐리즘이라고 합니다. 니체는 삶의 목표가 결여되어 있는 것을 니힐리즘이라고 말합니다. 무엇때문에 사는 것인지 그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마흔에 읽는 니체에 대한 제 코멘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신본주의 시대에 인생의 의미를 신을 찬양하는 자, 신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자로 여겼다면, 정작 사람이 의지처로 인의로 만든 신이 죽은 인본주의 시대에서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되는데 이러한 방황속에서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니체가 하고 싶은 말이겠지요.
먼저, 카뮈의 말에 대해 제 생각을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사람은 너무 생각이 많습니다. 토끼처럼 풀을 뜯어 먹으면 그만이고, 호랑이처럼 사냥감을 찾아 어슬렁 거리면 그만입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순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이 지혜로운가요?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인간에게서 나왔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생명은 죽음으로 끝을 맺습니다. 영생하는 생명체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태어났으면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알베르 카뮈의 물음.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이런 물음은 자기중심적 태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인간중심, 자기 중심에서 나온 물음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세상의 중심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연의 중심이 아닙니다. 인간은 생물의 중심이 아닙니다. 한 인간은 한 사회의 중심이 아닙니다.
돼지에게 지성이 있다면 그래서 스스로 사유한다면 돼지가 자신의 가치를 묻고 답할 수 있습니까? 존재는 그 존재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그 가치가 이미 매겨져 있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귀중한 것입니다. 누구도 그 가치를 높이거나 낮출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절대적인 가치의 평가란 없습니다.
사람은 지구에 존재하고, 먹음으로써 살고, 생각함으로써 발전하고, 놀면서 즐거워하고, 쉬면서 충전을 얻고, 어울림으로써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사랑함으로써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니체의 말에 대해 대답합니다.
자기 자신이 삶의 의미를 설정하고, 당당히 자신의 걸음을 걸어가라는 니체의 말에 동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의 방향은 아닙니다. 개인이 삶을 주도적으로 살기로 결심하는 것일 뿐입니다.
인류가 독특한 존재라는 것은, 자기중심적 사고일 뿐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가르침과 유사합니다.
신의 형상에 따라 지어진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유의 능력을 발달시키고, 인간끼리 상호협력적 자세를 견지하는 외에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인간은 죽을 운명이고, 삶을 살아가는 동안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진력할 뿐입니다. 그런면에서 니체가 말하는 자기주도적인 생에의 의지에는 동감하나, 인생이 다른 존재에 비해 특별하여 마치 신의 위치에서 세상을 다스리거나 조망해야 하는 것, 인생에 특별한 가치를 발견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그리스도교에서는 고통과 시련을 받는 이 세계의 삶은 단지 신의 시험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인간의 고통과 시련에도 방관하는 신의 모습이 성경에 비춰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면, 고통과 시련을 긍휼히 여기는 신의 사랑도 드러나는 것이 성경입니다.
인간 존재의 한계, 그로 인한 고통과 죽음, 또 인생의 즐거움, 또 인생의 괴로움 이것을 성경은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성경에서 신이 만든 인간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다가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신은 인간을 사랑하여 사랑의 도를 전달하는 자입니다. 신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