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릴적 살던 집
제 나이는 2023년인 올해 42세입니다.
저는 1982년 가을에 태어났습니다.
바닷가에서 태어났습니다.
동해, 서해, 남해 중 남해 바닷가입니다.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돌산 갓김치로 유명한 그 돌산도라는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자갈, 몽돌이 가득 찬 바닷가 바로 앞에 나의 집이 있었습니다.

작은 구멍가게를 하는 어머니, 9살차 누나, 7살 차 큰형, 5살 차 작은형과 함께 9살까지 살았습니다. 10살 때 집이 수용되면서 수원으로 이사를 왔지요.
집앞에서 조개를 파서 엄마에게 갖다주고,
여름에는 헤엄을 치고, 잠수를 해서 청각도 따고
태풍이 오면 집이 날아갈까봐 무거운 돌을 줄에 매여 지붕울 두르고
바다에 자갈돌을 던지며 놀았습니다.
10살때 엄마는 집이 수용되고 가족과 함께 수원으로 이사를 갔고,
따로 살던 아빠집에 같이 살게 된 나는 너무나 괴로웠지요.
엄마와 생이별을 한 후 살게 된 아빠의 집은 바닷가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밭 사이에 있었습니다.
뒤에는 동산이 있었고 앞에는 바다가 멀리에 보였지요.
내가 초등학생때 이미 할머니는 80이 넘었습니다.
할머니는 옥상계단에 걸터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셨습니다.
막내 아들을 그리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위 사진 왼쪽 상단의 노란색 표시가 바로 아빠의 집이었습니다.
엄마와 생이별을 했던 10살 봄 이후 나는 방학 때면 엄마를 찾아 수원으로 가는 무궁화호 기차를 탔습니다.
기차에서 팔던 맛있는 김밥을 먹으며 수원으로 올라갈 때의 기대감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1991년 여름방학때 처음 경기도 수원에 와 보았습니다.
엄마는 1.5층 방2개의 전세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위층은 주인집이었고, 아래집과 옆집은 전세나 월세를 사는 이웃이었습니다. 나중에 6학년때 전학와서보니 아랫집 반지하에는 같은반 친구가 살고 있더군요.
지금은 30년이 더 되어서 집이 낡아보이지만 30년 전에 시골소년이 보기에는 정말 멋졌습니다.
도착한 첫날 밤 바로 잠이 들고 다음날 따뜻한 햇볕, 그리고 골목길을 지나던 과일장수에게서 산 노란 바나나를 맛있게 먹었던 아름다운 기억에 지금도 황홀함이 느껴지네요.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 여름 열세살 때 나는 이 집으로, 엄마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중학교 1학년때 교회에서 나를 좋아했던 여학생이 우리집으로 찾아와 문을 두드렸습니다.
고백을 하려고 했던 것인데 너무 부끄러워서 문을 못열어줬던게 아직도 미안하네요.
중고등학생 시절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이브 밤에 교인들의 집을 돌면서 성탄노래를 불러주는데 교회 사람들이 작고 초라한 우리집에 오는 것이 정말로 부끄럽더군요.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할 사정이 생겨서, 우리가 맨위층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방이 3개로 넓었고, 옥상까지 사용할 수 있어서 좋았지요.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앉아 달, 별을 보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갔는데 수원에서 서울 동대문구는 정말로 멀더군요.
왕복 4시간 정도의 거리를 어떻게 견뎌내겠습니까?
결국 학교앞 고시원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남녀가 같은 샤워실을 쓰는 고시원, 방음이 안되던 곳

정확하지는 않지만 외대 정문 앞의 이정도 건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군대에서 휴가를 나오니 엄마는 장사를 하던 이불가게 근처로 이사를 했습니다.
수원 농수산물 시장 근처의 2층 집 전세였습니다.
누나가 조카를 낳아서 엄마가 길러야 하는데 엄마 이불가게 근처로 이사를 했어야 했나봅니다.
그리고 또 엄마는 몇차례 이사를 가시고는 아파트를 사셨죠. 다행이네요. 결국 세살이를 마치셨으니.
나는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 고시원, 시골 지자체에서 서울 거주 학생을 위해 만든 남도학숙, 자취방, 고시원총무방 등을 전전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하며 부랴 부랴 대구에 투룸 단독주택에 세를 들었다가, 대학원 휴학을 하는 바람에 의정부 빌라 1층에 잠시 자리를 잡았다가, 기숙사에서 2인 1실을 쓰다가 원룸에 전세를 살다가, 공무원 아파트에 전세를 살다가, 이번에 집을 샀습니다. 물론 대출을 최대치로 받고서..(몇년 전 일입니다).
어디에 사느냐? 마음상태와 생활, 시간활용, 여러가지에 영향을 미치고 습관을 바꾸고, 삶을 바꿉니다.
나는 언젠가 바닷가 보이는 섬이 많은 그런 잔잔한 바닷가 근처로 돌아가리라.
내가 태어난 집이 나에게 베스트였습니다.